본문 바로가기

그룹명/장례·장묘·추모

시대별 장례 변천사

조선시대부터 ‘죽음준비교육의 선구적 모습 자리매김’

 

사람은 태초부터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고인에게는 이승에서 마지막 가는 길이며, 고인을 보내는 산자의 입장에서는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어 민족별, 종교별, 사회, 문화적 관습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장례의식이 있어왔다.

 

우리나라의 시대별 장례문화를 살펴보기로 한다.

 

 

 

 

상고시대(단군~삼한시대)

<예>

기록으로 보면, 당시에는 죽음과 질병을 동일시하여 매우 꺼리는 염기사상(厭忌思想)이 있었던 듯하다. 또 사람이 죽으면 집을 헐어버리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수렵 및 목축생활을 한 것으로 사료되며, 죽음에 대한 사생관이 아직 생성되기 전인 듯하다. 당시의 장법으로는 시신을 주거로 사용하던 굴이나 지상에 덮어두는 방법, 자연적인 구릉지에 간단한 형태의 구덩이를 파거나 구덩이 없이 조개껍질이나 흙을 덮어 두는 방법, 또는 그 위에 돌을 쌓아 두는 방법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옥저>

사람이 죽으면 먼저 가매장을 한 다음에 후일 뼈만 추려서 나무로 만든 큰 곽 속에다 세골장을 하였던 듯하다. 그리고 온 가족은 모두 한 곽 속에 안치되었던 듯하다. 고인이 먹을 쌀을 곽의 입구에 넣어 두었다는 것을 보면, 이승과 저승이 한쪽 입구의 출입문을 통해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계세사상’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인의 뼈를 통한 부활과 재생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여>

나무로 곽을 만든 다음 관을 넣는 매장법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순장 후 후장의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이를 통한 계세사상의 흔적을 알 수 있다. 장례 기간(5개월)이 길고 얼음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시신보존처리가 어느 정도 발달했던 것으로 보이며, 날 것과 익힌 것 등 제물에 대한 언급과 상복 의미의 흰 옷 등에 대한 언급으로 미루어 보면 고인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의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한>

삼한에서는 장사지낼 때 관 밖의 곽에 큰 새의 깃털을 꽂았다. 이는 새가 영혼을 저승이나 천상에로 운반해가는 매개자로 여겨졌다는 반증이다. 깃털 대신 오리 모양의 토기가 부장품으로 낙동강 유역의 변한 진한 지역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또한 장송에 우마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우마가 가지는 재산적 가치로서의 후장 풍습 때문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는 종교적 의미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특히 말은 영혼을 지하의 세계에서 명계 즉 천상세계로 운반해가는 매개동물로 여겨졌다.

 

 

 

 

삼국시대(기원전 1세기~7세기)

 

<고구려>

혼인 후 곧바로 수의를 마련하면서 죽음을 준비한다는 기록을 보면, 삶과 죽음이 함께 진행된다는 믿음 하에 시신에게 상당한 예를 갖추어 치장을 함으로써 저승에서도 육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당시의 저승 관념과 사생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또 소나무 등 특별한 종류의 나무를 심어서 묘역을 조성한다는 기록을 보면, 고인의 무덤을 조경을 필요로 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집의 개념과 유사하게 생각하거나, 혹은 자생 풍수적 비보사상의 한 선구적 흔적으로도 보인다.

 

장사 후 재물을 나누어 주는 풍습은 상속 및 재물의 재분배로 볼 수 있다. 3년 상이나 3개월 상 등의 장례 기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유교적 상장례 문화가 이미 벌써 이 시대에 유입되어져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초상이 나면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지만 장사지낼 때에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노래하며 망자를 저승길로 인도하였다는 데에서는, 유교식 상장의례와는 구별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장례문화의 축제적 성격을 보는 것 같아서 일종의 흥미로움이 느껴진다.

 

<백제>

『수서』에 따르면 “백제의 상례제도는 고구려와 같다.”고 한다. 그 때문에 특히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고구려의 유제와 같이 3년 동안 상복을 입었으며, 그 나머지 친족들은 장례를 마치면 바로 복을 벗은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 자료를 통해서 그려볼 수 있는 백제의 장례 풍습 역시 고구려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그 밖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백제의 장례 풍습을 유출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화장하여 그 뼈를 추려 땅 속에 묻는 골호식 매장 법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다른 나라와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신라>

신라에서는 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염습 후 치장하고 상복을 입는 복제가 시행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증왕 때에 제정 반포된 이 상복 제도는 왕, 부모, 처자 모두 1년 동안만 상복을 착용토록 하여 고구려나 백제의 3년 상복제도와는 달리 그 기간이 단축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지증왕은 순장금지제도를 법제화한 왕으로서도 유명하며, 또 죽은 왕들에게 시호(諡號)를 사용하도록 한 왕으로서도 유명하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불교의 법식에 따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화장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많은 골호들이 경주 지방에서 발견되고 있는 점을 통해서 볼 때 이 당시에는 화장한 후 뼈를 항아리에 담아 묻거나(藏骨) 혹은 바다에 뼛가루를 뿌리는(散骨) 장법들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918년~1392년)

 

<고려>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발달하면서 상장례는 처음에는 통일신라의 예법을 그대로 답습해 나간 듯하다. 그런데 삼국시대부터 보급된 유교가 고려 성종 때 오복제도를 마련하는 등 확산 일로가 되면서부터 이후 상장례는 불교적 분위기에 유교적 색채를 가미해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즉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문벌귀족들이 새로 집권한 무인세력들에게 제압당하면서 신진세력들을 중심으로 유교적 상장례가 더욱 활발하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려의 화장묘는 6개의 판석으로 조립된 소형 석관을 사용하였으며, 이 석관에 화장한 골회(유골)을 넣어 매장하였다. 골호 대신 소형 석관을 사용한 점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화장묘와 구별된다. 그 밖에 자녀가 동등하게 제례에 참여하는 윤회(외손)봉사제도, 성종4년(985년)에 제정 반포된 상복제도(오복제도)와 장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일반화되어 있던 100일장 및 3일장 제도, 국상에 활용된 역월단상 제도(국정을 고려 장례기간을 줄이는 제도), 고려 중기 이후 등장하는 가족(문중)묘지제도의 탄생 등도 눈여겨 볼만한 특징들이다.

 

조선시대(1392년~1910년)

 

<조선>

화장전면 금지초기 /중기에는 유교적 상장례 문화가 정착되면서 화장이 전면 금지되었으며, 회격무덤묘제의 경우 『주자가례』에 서술된 내용을 바탕으로 매장을 전제로 한 돌방무덤에서 회격무덤에로의 전환을 맞게 되었다.

 

집단묘지 가묘 제도를 토대로 종법 원리가 뿌리를 내리면서 친족 문중단위 중심의 집단묘지가 성행하게 되었다. 또 지석 이외에 효를 가문의 위세를 내세우고자 묘비(묘석, 묘표, 묘갈, 신도표, 신도비)의 사용이 더욱 확산되었으며, 풍수이론을 토대로 한 음택 사상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생전 상.장례 준비를 조선시대에는 자신이 들어갈 관을 생전에 만들어 놓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또 생전에 관을 미리 만들어 드리는 것이 효자의 도리라고 여겨졌다. 수의도 생전에 입던 옷 가운데 좋은 것으로 골라 입혀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준비물들은 죽음준비교육의 선구적 모습들이 이미 조선시대에 일상 속에서 자리매김 되어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들이다.

 

 

 

 

일제강점기 및 해방시대(1910년~해방 후)

 

<일제강점 및 해방시대>

근대적 화장장(신당리 1902년) 설치와 1912년 제정 공포된 「취체규칙」은 우리의 전통 장례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노천 화장터에서 장작으로 불을 때어 집행되던 고전적인 화장법이 사라지게 되었고, 또 조선 성종대 국법에 의해 금지되었던 화장이 근 500여 년 만에 합법적인 제도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이 규칙에는 화장장과 공동묘지의 설치 허가, 시설 주변의 나무 식재 의무화. 화장장의 위생 관리 등과 같이 현대적인 시설 설치와 운영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사람이 죽은 후 24시간 이내에는 매장 또는 화장을 할 수 없다는, 현행 장사법에서 법적으로 유효한 내용까지도 들어 있다.

 

한편 1934년 조선총독부는 ‘건전한 장례’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의 전통적인 장례 풍습을 대폭 간소화시킨 <의례준칙>이라는 것을 제정하여 의례 개혁을 시도한다. <의례준칙>의 내용 가운데 상장례와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면,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무시하고 상주와 상복, 습렴, 상기 등 복잡하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만 발췌하여, 이제 새로이 임의적으로 20여 항목의 간소화된 장례 절차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례준칙>의 실행으로 말미암아, 그 동안 우리 전통 상장례 속에 내재되어 있던 근본정신(효의 정신, 숭조정신)과 절차가 완전히 무시되어져 버림으로써, 이후 우리의 상장례 문화는 이제 단순하게 시신을 처리하는 절차만 이행하는 수준으로 전락되어버리고 말았다.

 

해방이후에도 이러한 흐름은 별로 호전되지 않고 있으며, 그리하여 지금도 장례문화는 계속 시신위생처리기능 위주로만 치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이 모두가 <의례준칙>에서의 절차의 간소화가 가져온 결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모색이 매우 시급하며, 그 방안의 하나로 상중 제의례가 갖는 중요성을 재인식함으로써 이를 토대로 제의례 의식의 부활과 활성화가 매우 필요하다.

 

<시사상조신문 www.sisasangj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