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로 항일정신을 일깨운 유도발·유신영 선생 부자를 202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유도발(1832.6.~1910.10.음력), 유신영(1853.6.~1919.3.) 선생 부자는 풍산이 본관인 서애 유성룡의 10세, 11세 후손이다.
두 부자는 충효를 가업으로 삼아 경술국치와 광무황제 고종의 서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는 나라에 대해 의리를 실천했고 아들은 나라와 아버지에 대해 충효를 실천했다.
두 분의 자결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그 죽음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은 이들의 항일정신을 일깨워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는 울림이 됐다.
먼저, 부친 유도발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을 차마 살아갈 수 없다며 1910년 11월 11일 단식에 돌입했다.
유도발 선생은 “종사가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으니 남은 해가 얼마 없는데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욕된 일이 아닌가? 이후로는 다시 음식을 나에게 권하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명정(銘旌)에 ‘대한처사(大韓處士)’로 써 줄 것을 부탁했다.
명정은 죽은 사람의 관직이나 이름을 적은 기(旗)로, 선생이 대한처사로 써 달라고 한 것은 죽어도 영원히 대한제국의 선비임을 천명한 것이다.
1910년 11월 27일 단식 17일째, 선생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음은 일제의 강제병합에 대한 강력한 항거로, 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아들 유신영 선생은 선대의 가업을 철저히 익히고 항일 인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학문과 사상을 넓혀나갔다.
1895년 유인석 의진과 1896년 권세연 의진에 참여하여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는 선생의 문집『하은유고(霞隱遺稿)』의 「행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1월 광무황제(고종)가 서거하자 친일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나는 나이가 많아 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마땅히 목숨을 바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선생이 할 수 있는 투쟁 방법은 죽음 뿐이라며, 1919년 3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이어 일제에 투쟁한 것으로, 남은 이들에게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항일투쟁의 울림이 됐다.
정부에서는 두 분 공훈을 기리기 위해 유도발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신영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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