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이후 개화기를 거치면서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문화와 개신교가 들어와 혼례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 혼례의 틀이 구식 혼례로 밀려나면서 이른바 신식 혼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일본과 서구의 혼례 요소가 19세기 중반까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부터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양식의 혼례가 시작되었으며, 기록에 의한 최신식 혼인은 1890년 정동 교회에서 올린 여신도 박신실과 남신도 강신성의 혼인식이었다.
이 시기에는 교육 기회의 확대로 인하여 지식층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신식 혼인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1907년 기독교식 혼례가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 기독교인들이 신식 혼례를 하기 시작했고, 불교계에서도 전통 혼례가 아닌 불교식 혼례를 창안했다.
이에 따라 혼례의 장소도 신랑신부집이 아닌 교회, 절, 학교 등으로 변하면서 혼례식의 유형도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신식 혼례는 전통 양식보다 간략한 절차, 간단한 의복, 적은 비용으로 치를 수 있었으므로 다수에 의해 환영을 받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여인들의 쓰개치마가 없어지고 단발 머리형이 나타났으며, 신식 혼례의 물품 대여 장소가 생겨났고 여기서 신부의 면사포와 신랑의 모닝코우트나 프록코트를 대여해 주었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양장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하여 신부 의상으로 웨딩 드레스가 등장한다.
이시기는 전통 혼례복과 서양식 혼례복이 혼용된 과도기적 시기이다. 일제 통치 기간을 통하여 혼례 변천사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건은 1934년 조선 총독부가 발표한 ‘의례준칙’이다.
결과적으로 구식 혼례는 밀려나고 일본과 서구의 혼합인 신식 혼례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오히려 고유한 민속 관행 속에 「가례」를 융합시켜 재래의 혼인 관행을 지속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에는 6.25 사변의 영향으로 평상복 차림의 혼례식이 있었으나 휴전 직후부터 신식 혼례식이 일반화되었고, 1950년대 말에는 예식장 및 미용실에서도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대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혼례복으로 신랑은 신사복이 등장하여 모닝코우트와 병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여성 혼례복은 흰색의 한복 치마와 저고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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