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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일본 박물관 덕혜옹주 유품 한국에 기증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문화학원 이사장 겸 박물관장 오오누마 스나오)과 오는 24일 오전 10시 일본 도쿄 주일한국문화원에서 박물관 소장 덕혜옹주 유품(복식 7점)에 대한 기증식을 갖고 기증을 위한 양해각서(MOU)에 서명한다.

 

이번에 기증받는 복식 7점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딸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년)가 일본에 머물던 당시 남긴 조선왕실 복식 중 일부이다. 이들 유품은 문화여자단기대학의 학장을 맡았던 도쿠가와 요시치카가 1956년 영친왕 부부로부터 기증받은 것으로 이후 1979년 개관한 문화학원 복식박물관에서 소장해 왔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고종(高宗)과 궁녀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모두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1살이 채되지 못해 사망하였기 때문에 덕혜옹주가 외동딸이었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고 말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31년 5월 일본의 귀족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15년동안 입원되었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덕혜옹주는 살아생전 항상 고국(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싶어 했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도 덕혜옹주를 찾는 이는 없었다.

 

해방이후에도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덕혜옹주의 귀국이 거부했다. 그렇게 돌아오고 싶어 했던 고국에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이 지나서 1982년에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비련의 여인이다.

 

기증 유물은 아동용 당의와 치마, 아동용 저고리와 바지, 아동용 속바지, 어른용 반회장저고리와 치마 등 모두 7점으로 덕혜옹주의 유품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당대 최고 수준의 왕실 복식 유물로서 복식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박물관이 역사적 가치가 큰 소장품을 외부에 기증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덕혜옹주 유품 기증에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여 양국의 문화적 우호협력 증대를 소망하는 오오누마 스나오 이사장 겸 박물관장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시사상조신문 www.sisasangj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