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워홈 구자학(具滋學) 회장이 12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고(故) 구자학 아워홈 회장은 1930년 7월 15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姑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진주고등학교를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59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군복무 시절 6.25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호국영웅기장 등 다수의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어 미국으로 유학해 디파이언스 대학교(Defiance College) 상경학과를 졸업했으며, 충북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를 취득했다.
그는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당시 “나라가 죽고 사는 기로에 있다. 기업은 돈을 벌어 나라를, 국민을 부강하게 해야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 일념 하나로 산업 불모지를 개척했다. 이는 해국사관학교 출신으로 6.25 참전과 다수의 훈장이 증명하는 ‘보국’에 헌신한 남다른 경력에서 이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1960년 한일은행을 시작으로 호텔신라, 제일제당, 중앙개발, 럭키(現 LG화학), 금성사(現 LG전자), 금성일렉트론(現 SK하이닉스), LG건설(現 GS건설) 등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일선에서 뛰었다.
1980년 ㈜럭키 대표이사 재직 시절, 구 회장은 기업과 나라가 잘 되려면 기술력만이 답이라고 여겼다. 80년대 당시 세계 석유화학시장 수출 강국인 일본과 대만을 따라잡기 위해 기술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구 회장은 당시 “우리는 지금 가진 게 없다. 자본도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도 없다. 오직 창의력과 기술, 지금 우리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현장을 찾았다. 어느 공장을 가도 그의 손때가 묻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처럼 무엇보다 기술력을 중요시했던 구 회장은 “남이 하지 않는 것, 남이 못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가 걸어온 길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다. 럭키는 1981년 ‘국민치약’이라는 수식과 함께 당시에 없던 잇몸질환을 예방하는 페리오 치약을 개발했다.
이후 1983년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 PBT를 만들어 한국 화학산업의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이어 1985년에는 화장품 ‘드봉’을 해외에 수출했다. 국내 화장품 브랜드의 첫 해외 수출이었다.
1989년 금성일렉트론에서는 세계 최초로 램버스 D램 반도체를 개발했으며, 1995년 LG엔지니어링에서는 굴지의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국내 업계 최초로 일본 플랜트 사업을 수주했다. 현재 LG의 근간이 된 주요사업의 시작과 중심에는 늘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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