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고통 딛고 평화의 나비 된 일생
◆방앗간 앞에서 끌려간 열네살 순이, 갖은 고초 끝에 돌아와 힘든 삶
◆고통스런 기억을 딛고 여성·평화·인권운동가로 노년기 활발한 활동
◆독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 참석 등 수원지역 평화인권운동 구심점 역할
나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국가기념일이다.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피해를 증언한 날을 기념해 정해졌다.
수원시에도 위안부 피해자가 살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소녀였지만 끔찍했던 기억을 꺼내 평화와 인권을 설파하는 활동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故 안점순(1928~2018) 할머니다. 일본의 만행을 알려 다시는 전쟁과 핍박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던 할머니는 일본으로부터 직접적인 사과를 듣지 못한 채 영면했다.
방앗간 앞에서 시작된 악몽의 시간
순이는 일제의 핍박이 극심하던 1928년 겨울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셔서 순이 가족은 형편이 좋지 못했다.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순이는 무슨 일이든 찾아 열심히 하는 효심 깊은 소녀로 자랐다.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마포 복사골 큰 방앗간 앞으로 몇 살부터 몇 살까지의 여자아이들은 다 모이라’는 방송이 울려 퍼진 어느 날, 순이는 엄마 손을 잡고 방앗간 앞으로 갔다. 오라면 가야 하는 시절이었다.
쌀가마를 재는 저울에 여성들이 한 명씩 올라섰다. 그 중 어느 정도 몸무게가 나가는 여성들은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올라타야 했다. 또래에 비해 덩치가 좋아 50㎏을 넘겼던 순이도 트럭에 실렸다. 그렇게 “내 딸을 왜 끌고 가느냐”고 울며 매달리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트럭은 달렸다. 순이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트럭은 여러 번 어딘가에서 멈춰 여성들을 더 태웠다. 여성들은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중국 베이징으로, 톈진으로 이동해 어딘지 분간조차 어려운 곳으로 끌려갔다. 산도 없고, 나무도 없고, 누런 모래가 뒤덮인 사막 같은 곳 가운데 덩그러니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이 시작됐다. 일본 군인들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칼로 위협하기도 했다. 훗날 순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옥 같은 생활은 3년 넘게 지속됐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 군인들은 여성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중국군과 러시아군이 쳐들어와 무차별 공격을 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방법도 모르는 순이는 무작정 걸었다.
며칠이 지나 어렵사리 베이징에 도착한 순이는 우연히 광복군을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집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8개월 정도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추스른 순이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귀국선 소식을 듣고 톈진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복사골 집으로 걸어가는 길, 순이는 떡시루를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하루도 빠짐없이 딸을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집에 돌아온 순이와 어머니는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안점순’ 이름으로 세상에 서다
순이가 ‘안점순’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집에 돌아온 후 석 달을 앓아누웠던 순이는 남자라면 진저리가 나 결혼은 생각하기 싫었다. 결혼하고 잘 사는 남들을 보며 속이 아팠지만 속으로 삼켰다. 또다시 전쟁이 발생했고, 피난 생활을 하며 생계를 위해 빨래와 식당일 등을 가리지 않았다. 대구부터 강원도까지 옮겨 다니다 30대 초반부터 식당을 운영하며 고된 삶을 이어갔다.
고통스러운 날들 속에도 가족들은 순이에게 큰 힘이 되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공개하고 2년이 흐른 1993년 8월, 막내 조카가 안점순을 피해자로 신고하고 피해자생활안정지원법 대상자로 등록했다. 당시 신고서류에는 ‘대인기피증’이라는 다섯 글자뿐이었다.
수원에 살고 있던 조카의 권유로 수원으로 온 뒤에도 위안부 피해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마음을 열기 위해 피해자 지원단체가 끊임없이 노력했고, 75세가 된 순이는 드디어 마음을 열고 ‘안점순’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피해자 등록 후 10년이 지난 2002년이었다.
같은 아픔을 가진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 서로를 보듬은 안점순 할머니는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UN 인권위원회 여성폭력문제특별보고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ILO(국제노동기구)의 국제심포지엄에도 참여해 자신의 경험을 쏟아냈다.
직접 일본으로 가 증언 집회 및 일본 국회에서 참혹한 전쟁의 피해를 낱낱이 밝혔다. 다른 아시아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2015년 한일합의 무효를 외치며 위로금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안점순 할머니와 수원평화나비, 수원시의 ‘동행’
평화와 인권을 위한 안점순 할머니의 활동은 수원지역사회에 큰 울림을 주면서 수원에서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수원평화나비의 활동의 밑거름이자 원동력이 됐다.
2014년 3월 수원에서 평화비를 건립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시작돼 건립기금 7천여만 원이 모아졌다. 수원시 역시 다산목민대상 대상 시상금 일부를 기부했고, 시민들의 마음을 담은 평화비는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세워졌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염원하는 노란 나비 브로치가 제막식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이날 수원평화비 건립을 계기로 ‘수원평화나비’가 창립, 피해자의 인권회복과 매월 수요집회를 주관하며 안점순 할머니와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이후 안점순 할머니와 수원평화나비, 수원시는 유럽 최초의 평화비 건립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2016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수원시가 소녀상 건립을 제안했고, 74개 시민단체와 함께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시민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조직적인 방해로 프라이부르크 소녀상은 결국 무산됐다.
수원시와 수원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 현지에서 독일추진위가 결성돼 힘을 보태면서 수원시민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평화의 소녀상은 독일 중남부 레겐스부르크 인근 네팔 히말라야 파비용 공원에 자리할 수 있게 됐다. 안점순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독일까지 날아가 2017년 3월 8일(현지 시각)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해 “험한 세상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소녀상은 ‘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안점순 할머니는 1년여만인 2018년 3월 30일 고단하지만 아름다웠던 삶을 마감했다. 꾸준한 인연을 이어오던 수원시는 할머니의 장례를 수원시민사회장으로 치러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또 같은 해 8월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수원을 빛낸 8인 중 한 명으로 안점순 할머니를 헌액하고, 사이버 명예의 전당을 오픈해 온라인으로 언제든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수원시와 수원평화나비는 올해 안점순 할머니를 기리는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을 만들었다. 수원시가족여성회관에 추모 공간 및 기림비를 만들어 피해자의 허물을 벗고 여성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다시 태어난 안점순 할머니의 뜻에 따라 일본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데 일조하기 위해서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개관은 미뤄졌지만 향후 시민들이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쟁과 폭력의 부당함을 알리는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안점순 할머니의 바람은 단 하나였다. 생전에 인터뷰에서 그 바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라도 말 한마디라도 사죄 한마디 하면 끝날 일인데. 억만금을 준들 청춘이 돌아오겠어? 자기들(일본)이 사과했다지만 그 사람들(정부)한테 천 번만 번 하면 뭐하나. 본인들 곁에 와서 한마디라도 하는 게 원칙 아니야? 말 한마디가 듣고 싶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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